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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기호일보 입력 : 2025.02.06 2025.02.07일자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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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심리와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드는 심리적 조종 방법을 뜻하는 용어가 있다. 간단히는 심리적 지배라는 뜻의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 그것이다. 2022년 미국의 유명 사전 출판사 메리엄 웹스터가 그해의 단어로 선정할 정도로 가스라이팅은 대중화됐다.
가스라이팅은 영국의 극작가 패트릭 해밀턴의 1938년작 희곡 ‘가스등(Gaslight)’에서 유래했다. ‘시드니 파워’는 먼 친척이었던 한 귀부인의 보석을 훔치기 위해 20년 전 그녀를 살해한다. 하지만 끝내 보석을 찾지 못했고, 유력한 용의자였던 그는 증거불충분으로 체포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잭 매닝엄’으로 신분을 세탁한 그는 아내 ‘벨라’와 결혼한 후 오랜 기간 방치됐던 귀부인의 집으로 이사한다. 그리곤 귀부인의 옷가지와 물건들을 하나씩 다락방으로 가지고 가 등을 켜고 보석을 찾기 시작한다. 문제는 건물 전체가 가스를 나눠 쓰는 형태다 보니 다락방에서 가스등을 켤 때마다 다른 곳의 가스등이 희미해진다는 것이다. 벨라는 잭이 외출을 하고 나면 갑자기 다락에서 발소리가 나더니 거실 가스등이 어두워지는 것에 의문을 품는다.하지만 잭은 오히려 "헛것을 봤다"며 벨라를 정신병자로 취급할 뿐이다. 심지어 물건을 몰래 감춰 두고는 이를 못 찾는 벨라를 다그치거나 일부러 소리를 내곤 벨라가 환청을 듣는 것처럼 몰아세우기도 한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벨라도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나중에는 "내가 정말 미친 걸까?"라고 의심하게 됐고, 급기야 세상과 단절한 채 오직 남편의 말만 믿고 따르게 된다. 여기서 범죄자 남편이 가스등이 어두워지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앞세워 부인을 정신병자로 몰아가는 행태를 두고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생겼다. 다행스럽게도 희곡은 전직 경찰 ‘러프’의 등장으로 잭의 범죄가 발각되면서 나름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결론을 맞이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최근 가스라이팅을 동반한 범죄들이 기승이다. 데이트폭력과 성폭력, 가정폭력, 사이버 종교 등이 대표적이다. 가스라이팅의 수법은 단순하지만 치밀하다. 일상의 사소한 문제까지도 대신 해결해 주고 "다 널 위해 하는 일"이라거나 "나 없이 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식의 말을 하며 피해자의 존재가치를 무너뜨리고 철저히 가해자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치 아동학대범이 아이를 실컷 두들겨 때린 후 상처난 부위에 연고를 발라 주며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라고 하듯 밀당(?)을 하며 서서히 피해자를 길들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가족과 연인, 친구라는 밀접한 관계를 이용하거나 몇 해 전 넷플릭스에서 화제가 됐던 ‘나는 신이다’ 속 사이비 교주들처럼 감히 신의 이름을 팔기도 한다. 일단 가스라이팅이 돼 버리면 그때부터 범죄는 일사천리다. 피해자조차 자신이 피해자라 생각지 않고 오히려 가해자를 분노케 한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며 죄책감을 가질 정도니 가스라이팅이야말로 완전범죄를 위한 최고의 범행 수법이 된 것이다.여기에 타인을 심리적으로 지배한다는 기존 의미에서 ‘이익을 보기 위해 타인을 속이는 행위’로 의미가 확장될 정도로 사기 등 경제범죄에서도 가스라이팅이 기승이다. "I’m 신뢰예요"라고 외쳤지만 실제로는 재벌 3세를 사칭하며 30억 원대의 사기 행각을 벌인 전청조나 투자자들에게 허위 주식 정보를 퍼뜨리고 헐값의 장외 주식을 비싸게 팔아 수백억 원대 부당 이익을 챙긴 ‘청담동 주식부자’ 이희진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별다른 인연이 없음에도 오직 ‘재벌 3세’와 ‘주식부자’라는 타이틀만으로 피해자들의 판단력을 흐려지게 만든 것이다. 가스라이팅이 범죄와 결합할 때 그 피해는 막심하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의 말을 맹신하지 말고, 항상 주위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형성하며, 가스라이팅의 징조를 보이는 자와는 관계를 재정립하거나 끊어 버리라는 뻔한 조언조차 절실한 순간이다. 가스라이팅 만연한 세상, 가스등이 어두워졌다는 ‘팩트’를 믿고 그렇지 않다는 ‘주장’을 멀리 하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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